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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06 탕자시대 -소망- (눅 15:17-19)
작성일 :  2021-06-14 10:00
이름 :  admin E-M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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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탕자시대의 그 탕자 문명은 누부시게 발전해가고 있습니다. 원자력의 그 에너지는 무진장이라 할 힘의 성장을 가져왔습니다. 새로운 석기시대로 일컬어지는 반도체 산업은 너무도 급진적이어서 인간은 자기운명조차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착각과 자만으로 넘치고 있으면서 전통적인 가치관마저 마구 흔들린지 오래입니다. 아직도 종교는 필요한가? 과연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하나님이 이 세계를 지금도 지배하고 계시는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이 소용돌이 치고 있는 세기의 물결을 왜 방관하고 계시는가? 과연 오늘날에도 그리스도는 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도전의식들로 세상은 충만해 가고 있습니다. 탕자시대가 남긴 정신적, 영적, 후패증입니다. 그런데 우리 속담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습니다. 탕자시대는 정말 아무 소망이 없는 것일까? 우리 성경은 아래와 같은 소망의 탈출구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탕자시대의 소망은?

  一. 회개입니다.

  여기 회개는 중생(거듭남) 생명을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전인(全人)이 하나님을 향하도록 의식적으로 방향전환을 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말합니다. 어떤 내용의 회개인가? 1. 과거 앞에 자기를 보며 허무의 절망을 하는 이것입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보고) 가로되(17) 이 말은 그가 그 자신에게 와서 보니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회개의 요소 중에 특별히 지적() 요소를 포함하는 뜻입니다. 지식적으로 그의 죄와 죄의 실상을 인지하게 됨을 가리킵니다. 탕자는 자기의 과거를 되돌아보니 아버지를 떠나 돈을 따라 가다가 돈의 종착역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아버지도, 돈도, 권리도 없는 텅텅 빈 공허 속에 뒹굴고 있는 자기를 발견했습니다. 그가 주인으로, 아버지로 섬겨오던 돈이 그만 폭군으로 화해짐을 깨달았습니다. 술취함과 열락속에서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소비적 과거 속에 남는 것이 없어져 버린 자기를 보게 된 것입니다. 2. 자기의 현재 앞에 죽음의 절망을 절감하는 이것입니다.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17)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회개의 요소 중 감정적()요소입니다. 진정한 자기 비참을 느낄 때 자기가 죽음에 이르게 된 환자임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는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로 간 결과 죽음에 이르는 자멸의 위기에 이르고만 자기의 현재 앞에 절망하는 것입니다. ‘내가 죽는구나하고 깨달았을 때 삶이 귀한 것임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어찌할꼬’(2:37,38)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 할 때 새로운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3. 새로운 미래 앞에 자신의 비젼을 거는 것입니다(18,19). 이것은 회개의 요소 중에 의지적()요소입니다. 곧 죄악에서 떠나는 과감한 자기 결단입니다. ①「내가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라고 했습니다. 그의 동작의 방향과 목표는 정확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께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정상적 행로입니다. 아버지! 그는 우리 생의 목표입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라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위대한 자기 독백입니다. 깊고 깊은 죄의식의 폭로입니다. 이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는 바울의 심정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깊은 절망의 바위가 갈라져 터져 나오는 생수입니다. 여기에 탕자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만난 세리가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8:13). 탕자시대의 참 살 길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인임을 깨닫는 여기에 있습니다. 탕자시대는 이러한 근본자세를 취하기를 싫어합니다. 또한 이러한 자기의 참상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 소리를 발함이 부끄러운 줄로 여깁니다. 비겁한 일로 여깁니다. 연약한 노예관념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진정한 고백의 소리에 주님은 찾아오시고 마는 것입니다. 벌 받을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19). 그는 이제 지은 죄에 대한 벌 받을 각오를 합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각오하는 그 순간 그의 벌은 벌써 없어진 것입니다. 주님이 대신 지신 것입니다. 이젠 그의 의지와 지식과 감정은 아버지만으로 충만합니다. 결단의 행동화입니다. 이제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20) 그의 마음 속 인격의 지성소에서 벌어진 회개 운동이 저렇게도 과감하게 죄악의 자리를 박차고 아버지께로 용진하는 행동의 결단을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죄악에서 갈라지는 강력한 성별운동입니다. 결단력과 실천력이 병행하는 회개! 그것이 진정한 효과를 보는 소망의 회개입니다. 현대 탕자시대의 정치! 사회! 예술! 교육! 가정문제, 인종문제등 온갖 탕자문명으로 만신창이 된 탕자도시에서 일어나 아버지께로 가야합니다. 탕자는 죄인 된 모습 그대로, 지체 없이, 적나라하게 아버지께로 갔습니다. 이제 그에게 더 이상의 고독은 없습니다. 더 이상의 굶주림은 없습니다. 오직 환희와 영광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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